개기일식 - 유희 단편소설 01
아내와의 신경전은 이미 시작부터 나의 완패가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천상리 가는 길에 만난 사내와 짧은 대화를 나눈다. 부도가 마치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에 사내는 어렵게 이룬 철공점을 모두 잃고 감옥까지 들어가게 된다. 사내의 아내는 2년 동안은 용케 버텼지만 연락이 끊겨 버렸다. '나'는 그 부도의 시기에 월급 한 번 밀린 적 없었지만 아내와 아이들에게 버림받았다. 청산리 가는 그 길목에 만난 그 사내와 나는 무엇이 다를까.
[본문]
“꼭 그렇게 해야 해? 내게도 아버지로서 자식을 교육할 권리와 의무가 있잖아!”
“고리타분한 말씀 좀 그만하세요. 보세요. 당신이 만일 유학이라도 갔었다면 지금같이 조그만 회사 임원자리에 만족하고 있지는 않았을 거예요. 아이들마저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부모가 할 도리예요?”
“이곳에서는 그렇게 길이 없단 말이야?”
“정말 그렇게 답답한 소리만 할 거예요?”
나는 입을 닫았다. 예견했듯이 어떻게 아내를 이길 수 있는가. 명쾌하고 간결한 아내의 산수, 나는 여태껏 거기에 동조하고 박수를 보냈다. 세상의 도전으로부터 나의 우유부단함을 막아주었던 고마운 아내의 산수. 하지만 아내의 산수는 새로운 방정식을 만들었다. 그 수식에 따라 아내와 두 아이는 태평양을 건너고 나는 회사근처 원룸으로 이사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슈퍼컴퓨터라도 동원했는지 방정식의 해법을 도출해내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인생이 이렇게 손쉽게 결정되고, 이렇게 재빠르게 각도를 바꿀 수 있도록 복잡하지 않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발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