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자의 슬픔
'약한 자의 슬픔'은 작가 김동인이 일제 강점기, 신식 교육제도의 혜택을 누리는 한 가난한 평민 여성의 삶을 통해 '약자'의 슬픔을 특유의 섬세한 감성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주인공인 엘리자베스는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어가던 시대적 과도기를 겪으며, 흔치 않던 지식인이라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여자라는 한계와 부모를 잃은 가난한 고아라는 사회의 약자로서 스스로가 불행한 삶을 선택해간다. 세상의 불의한 권력 앞에 배신당하고 내버려지게 된 그녀는 자의에 의한 순종이 아니리 비굴한 복종으로 스스로를 단죄한다.
법의 힘을 빌려 억울한 처지를 보상받으려 해보지만 스스로를 당당히 변론조차 해보지 못한 채 처절한 패배를 맛보게 된다. 엘리자베스의 처지는 일본에게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조선의 처지를 대변한다. 나라에는 백성들을 지키고 이끌어갈 부모와 같은 지도자가 없었다. 엘리자베스가 남작의 욕망에 유린을 당한 것처럼 나라의 권력자들은 일본의 야욕에 굴복당했다. 그녀가 남작의 유혹에 저항하지 못한 것은 그녀 안에 존재하고 있던 허영심과 욕망 때문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나라를 팔아 먹은 매국노들도 오직 그들의 욕망을 채우려는 야망의 노예들이었을 뿐이다. 엘리자베스는 불의한 권력 앞에 당당히 맞서지 못하고 스스로 약자이며, 피해자이며, 패배자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녀는 '내 것'인 태아를 잃어버린 후에야 깨닫는다. 부끄러운 자화상을 반성하며 추하고 나약했던 과거를 딛고 일어나 자주적인 의지로 미래를 열어 보려고 한다. 그리고 그녀가 선택한 미래의 희망은 '사랑'이었다. 사랑은 용서가 전제되어야 한다. 분기로 투쟁과 복수를 선택하기보다는 '사랑'으로 수용과 포용을 선택한 작가의 심리상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작가는 일제의 부당한 야욕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용서와 포용을 선택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의 마지막 선택인 '사랑'이 비굴한 자기합리화의 변명처럼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의로운 분노가 아쉬운지도 모른다.
기독교 정신인 용서와 사랑은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의로운 분노와 투쟁이 없이 세상은 인간들이 추구하는 이상을 충족시킬 수 없다. 마지막은 인류에 대한 용서와 사랑으로 결론맺어여야 하지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용기와 투쟁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의의 실현이 가능해질 때, 참다운 사랑은 용서와 치유라는 평화의 열매로 보상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2017년 봄의 끝자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