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 Le Petit Prince
어린 왕자 Le Petit Prince
《어린 왕자》는 정말 우연찮게 나온 책이다.
작가이자 비행기 조종사로서 명성을 드높이던 생텍쥐페리는 자국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하기 직전인 1939년, 대다수 문화 예술계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미국으로 향한다. 생텍쥐페리는 뉴욕에 거주하며,자신의 책 출판과 집필,강연등을 하며 생활했다. 미국의 친분있는 출판 관계자와 만나기로 한 어느 날, 식당에서 평소에 머릿속을 맴돌던 어린 아이의 모습을 냅킨에 끄적거리며 기다렸는데,그 때 출판 관계자가 낙서랄 수 있는 그림을 보더니 그 아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동화를 한 권 내면 어떻겠느냐는 권유로 ‘어린 왕자’는 태어났다. 생텍쥐페리는 처음에 책을 쓸 마음이 없었지만,출판 관계자의 끈질긴 권유와 지원으로 성사가 되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눈으로는 보지 못해. 마음으로 찾아야 해.”
“넌 네가 길들인 것에 언제까지고 책임을 져야 해. ”
“사막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사막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있기 때문이야...”
아름답고도 슬픈 내용의《어린 왕자》는 동화의 틀을 빌린 이야기이다. 《어린 왕자》는 다른 별에서 지구로 온 연약하고도 순수한 한 아이의 눈을 통해 허위와 기만에 찬 어른들의 세상을 비판한다. 그리고, 또한 자기 별의 의미와 자유, 사랑, 우정을 다루면서,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잊고 지내왔던,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준다. 《어린 왕자》는 우리를 꿈꾸는 듯한 비현실의 세계로 끌어들이지만, 당시 시대적 정황도 포착되어 있고,작가 자신의 사생활까지도 아우르고 있어, 책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비유에 숨겨진 의미를 알면 알수록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비범한 책이다.
생텍쥐페리는 그 동안 쓴 자신의 글에서, 사람 사이의 소통,그리움,삶과 죽음의 의미,책임감,인류애를 다루었다. 그것은 그만의 비행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지만,작가적 역량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어린 왕자》는 현실의 언어가 아닌 마음의 언어를 사용하면서,쉬운 문장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지만,다양한 뜻를 담고 있어,책을 읽는 이에 따라 달리 읽힐 여지가 있다. 이러한 점 또한《어린 왕자》를 읽는 중요한 포인트로 작용할 수 있을 것같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어린 왕자》는 생텍쥐페리 자신이 그린 삽화가 들어있다. 지금 봐도,순수하고 열정이 넘치는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랑스러운 그림들이다. (생텍쥐페리는 삽화 하나를 그리려고 수십번을 고쳐 그리며,몇날 며칠을 서재에 틀어박혀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글의 내용이야 물론이겠지만,생텍쥐페리는 이미지를 통해 우리들에게 더 가깝게 다가선 것이다.
70년이 넘게 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어린 왕자》는,국내에서만도 아동용 그림책을 포함해서 이백여 권의 책이 나온 걸로 안다. 그 독서 열기가 실로 뜨겁다. 하지만, 출판된 책으로 눈을 돌려보면,사정은 달라진다. 영역본의 번역은 제쳐두고라도,불어 원문을 텍스트로 해서 우리말로 옮긴 책에서,번역자는 저마다 작가의 의도를 살렸노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눈에 거슬리는 오역은 물론이고,글의 뉘앙스를 살린다고(그‘뉘앙스’라는 것도 자의적인 판단일 거라 여겨지지만) 아예 원문 자체를 뭉개듯 옮기거나 새로운 창작을 하는 수준에까지 이른 책들이 많다. 더 나쁜 것은 표절이다. 번역서임을 감안하더래도, 옮긴이의 문체가 분명 있을텐데말이다. 묻어두고 그냥 지나칠 일은 아니다.
옮긴 이 본인 역시 다 올바르지는 않다. 그러나,실수를 줄이려고 많이 애썼다. 또 한가지, 우리가 알게 모르게 무심코 사용하는 한자(漢字)나 일본식 한자(漢字)라든지, 일본식 또는 영어식 표현을 적절한 우리말로 옮기는데 부족하나마 신경을 많이 썼다는 점도 알아주기 바란다. 혹시 모르고 빠뜨렸거나 잘못된 것은 개정판으로 보완하겠다.
끝으로,여러분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어린 왕자’가 이 책을 읽어 나가면서 오롯이 되살아나기를 기대하며,생텍쥐페리가 전하는 메시지를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겼으면 한다.